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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간만에 인사드립니다.

구사
올려주신 자료 열심히 공부해야 하는데... 한국도 경제상황이 매우 어려운 지경이라 쉽지 않습니다.

아래 글은 어떤 분이 바울의 구약 인용문제를 비판하는 내용입니다.
아래 두 부분은 찾아봐도 명확한 해설을 찾기 힘들어 질문을 드립니다.

(1) 바울은 미드라쉬(Midrash)와 페셰르(Pesher)라는 성서의 해석에 관한 기본 개념들에 근거하고 있다고 하는데
     이와 관련된 글이 있거나, 알고 계신 것이 있는지요?

(2) 갈라디아서 3:16과 창세기 12:7, 13:15 등의 '자손(히브리어: 제라, zera)'이라는 단어의
     집합명사(collective noun)의 쓰임에 대해서도 알고 계신 것이 있으면 나누어주시기 바랍니다.

--- 이하 바울 구약 인용에 대한 비판 글 ---

성서를 비판적으로 세심하게 분석하고 읽어 본 사람들은 기독교의 교리를 대부분 뼈대를 만든 자칭 사도 바울이 얼마나 궤변론자(詭辯論者)인지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 15장 4절에서 "성경(구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라고 언급했을 때, 학자들은 바울이 염두에 둔 가장 유력한 '성경' 구절로 호세아 6장 2절을 꼽는다.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셋째 날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의 앞에서 살리라" (호세아6:2)...배경의 이해 없이 보면 바울의 주장처럼 예수의 삼 일만의 부활을 예언한 것처럼 보인다.

이 글은 호세아 선지자(BC 8세기)가 활동하던 당시, 이스라엘은 앗수르의 위협 속에 있었고 그것이 이스라엘 민족이 영적으로 타락해 있었다고 호세아는 말하고 있는 것이다. 호세아 본문의 '우리'는 메시아 한 사람(개인)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심판받아 상처 입은 이스라엘 공동체(북이스라엘/에브라임)를 지적하는 글이다.

여기서 "살리시며", "일으키시리니"는 죽은 시체가 무덤에서 나오는 생물학적 부활이 아니다. 이는 전쟁이나 재난으로 인해 '죽은 것과 다름없는 상태'인 국가적 위기에서 정치적, 사회적으로 회복되는 것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이었다.

히브리 문학(구약)에서 "이틀 후"와 "셋째 날"이라는 표현은 숫자 2와 3을 나열하여 "아주 짧은 시간 내에" 혹은 "속히"라는 의미를 전달하는 시적 관용구다. 즉, 하나님이 징계하시더라도 우리가 회개하면 "지체하지 않고 곧바로 회복시켜 주실 것"이라는 기대감을 나타낸 글이다.

바울은 이글을 삼일만에 예수 부활을 구약이 예언한 것으로 원래 문맥과는 전혀 다르게 인용하는 해석으로 자신의 신학을 만들어 낸다.

상당수 구약학자들은 호세아 6:1-3의 고백이 호세아 선지자의 진심 어린 권면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의 피상적이고 가벼운 회개를 풍자하는 말이라고 본다.

근거는 바로 이어지는 6장 4절에서 하나님은 이렇게 탄식한다. "에브라임아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 너희의 인애가 아침 구름이나 쉬 없어지는 이슬 같도다.“

백성들은 "하나님께 돌아가자! 그러면 금방 낫게 해주시겠지(이틀 뒤, 삼일 째)"라고 가볍게 생각했지만, 하나님은 그런 '값싼 회개'를 거부하신다는 문맥이다. 즉, 원래 본문은 "하나님을 너무 쉽게 생각하는 백성들의 안일한 태도"를 보여주는 구절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 성서학자들의 해석이다.

바울은 해당 구절의 맥락을 이해할 수 있는 다음 문장들에는 관심이 없었다.

결론적으로, 호세아는 "이스라엘이 징계를 받아도 하나님이 속히(3일쯤에) 회복시키실 것"이라는 (다소 안일할 수도 있는) 기대를 말했지만, 바울은 이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예수를 문자 그대로 3일 만에 다시 살리심으로써, 참된 회복을 시작하셨다"는 구속사적 성취로 재해석했다. 그럴싸한 문장만 찾으면 족했던 것이다.

바울의 이러한 해석을 미드라쉬(Midrash)와 페셰르(Pesher)라는 성서의 해석에 관한 기본 개념들에 근거하고 있다. 과거 (특히 종교적) 글들을 읽을 때 현대의 역사적-문법적 해석(원저자의 의도 파악)과는 다른 두 가지 주요 방식이다.

A. 미드라쉬 (Midrash): "현재적 의미 찾기"는 히브리어 동사 '다라쉬(darash, 찾다/구하다)'에서 유래했다. 고대 텍스트의 틈을 메우거나, 현재 상황에 맞게 재해석하여 적용하는 방식이다.

문맥을 넘어 단어와 단어 사이의 연결고리를 찾거나, 숨겨진 영적 의미를 캐낸다는 것이다. 예를 보자. (갈라디아서 4장)에서 바울은 아브라함의 두 아내 사라와 하갈 이야기를 인용하며 이를 "이것은 비유(Allegory)니"라고 선언한다. 그는 하갈을 '시내산 율법'으로, 사라를 '자유 있는 예루살렘(복음)'으로 재해석한다. 이는 창세기의 원래 문맥과는 전혀 다른 해석이다.

B. 페셰르 (Pesher): "이것이 곧 그것이다 (This is That) '페셰르'는 '해석' 또는 '꿈의 풀이'라는 뜻으로, 특히 쿰란 공동체(사해 사본)와 초기 기독교가 즐겨 사용한 종말론적 해석법이다.
이 해석법의 핵심 원리는 다음과 같다.

    1.  구약 예언자들은 자신이 쓴 글의 '진정한 의미(비밀, Mysterion)'를 몰랐다.
    2.  이 비밀은 마지막 날에 하나님이 세우신 '의의 교사'나 '메시아'를 통해서만 풀린다.
    3.  따라서 구약의 텍스트는 "지금 우리 공동체에서 일어난 이 사건"을 예언한 것이다.

바울에게 호세아 6장은 단순한 이스라엘의 회복 이야기가 아니었다. 그 텍스트는 수백 년간 '봉인된 비밀'이었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이 터지고 나서야 비로소 그 '페셰르(진정한 의미)'가 드러났다고 본 것이다. 어떻게? 성층권을 뚫고 그 위의 천국을 다녀온 본인에게 신이 직접 계시를 통해 밝혀준 진리라고 주장한다.

당대 유대교의 비판 : "성경 왜곡이다" 바울이 활동하던 당시, 정통 유대교 랍비들이나 일반 유대인들에게 바울의 해석은 받아들이기 힘든 '억지'였다. 이단인 것이다.

메시아관의 충돌 : 유대인들이 기다리던 메시아는 다윗과 같은 '승리하는 왕'이지, 나무에 달려 저주받아 죽고(신 21:23) 사흘 만에 살아나는 존재가 아니었다. 바울이 호세아나 이사야의 구절을 가져와 "이것이 죽은 메시아를 예언한 것이다"라고 주장했을 때, 유대인들에게는 이것이 "성경을 제멋대로 조각내어 끼워 맞추는 행위"로 보였다. 실제로 바울의 신학은 이런 멋대로의 끼워 맞추기가 대부분이다.

"십자가는 걸림돌(Skandalon)", 바울 자신도 고린도전서 1:23에서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걸림돌이 되는) 것이요"라고 고백한다. 즉, 자신의 해석이 유대인들의 보편적 성경 상식과 논리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트리포(Trypho)의 반박 : 2세기 기독교 변증가 저스틴 마터(Justin Martyr)가 쓴 『트리포와의 대화』를 보면, 유대인 학자 트리포는 "너희 기독교인들은 성경 본문의 문맥을 무시하고, 너희가 믿는 예수를 증명하기 위해 구절들을 억지로 뜯어고치고 있다"고 맹렬히 비난한다.

현대 성서비평학의 분석:
"본문 이탈(Proof-texting)" - 현대 역사 비평학자들은 바울의 해석 방식을 냉정하게 '본문 증거(Proof-texting)' 방식이라고 정의한다. 우리말로는 '성구 증명(聖句 證明)' 혹은 '증거 구절 대기'라고 번역할 수 있다.​ 이 용어는 주로 부정적인 뉘앙스로 사용되는데, "자신의 주장이나 교리를 뒷받침하기 위해, 성경의 원래 문맥(Context)을 무시하고 특정 구절만 핀셋으로 집어내듯 뽑아서 증거로 사용하는 방식"을 뜻한다. 소위 자의적 짜집기다. 이를 위해서는 맥락 무시(Decontextualization) 의 해석을 한다. 다른 말로 문맥의 거세 (Decontextualization)는 텍스트를 다루는 방식에서 '문맥(Context)'과 텍스트(Text) 늘 분리한다.  ​

정상적인 해석(Exegesis)은 문맥 (저자의 의도, 역사적 배경, 앞뒤 문장)을 먼저 연구하고 그 안에서 텍스트의 의미를 도출한다. 하지만 문맥 거세 ​Proof-texting (Eisegesis)는 내가 증명하고 싶은 결론(교리, 주장)을 먼저 정하고 성경 전체를 뒤져서 그 주장을 지지해 줄 것 같은 단어나 문장을 찾아내어 "보라, 성경에 이렇게 써있지 않느냐"라고 제시한다.

학자들은 바울이 호세아 6장의 '문맥(역사적 이스라엘의 회복)'을 무시하고, 필요한 '단어(제 삼일, 살리시며)'만 채취해 갔다고 지적한다. 학문적으로 엄밀히 말하면, 호세아 선지자는 예수를 염두에 두고 쓴 것이 아니므로, 바울의 해석은 원작자의 의도(Exegesis)가 아닌 독자의 임의적 주석, 주입(Eisegesis)에 해당한다.
사후적 재해석(Retrospective Re-reading): 샌더스(E.P. Sanders)나 라이트(N.T. Wright) 같은 바울 신학의 대가들도 바울이 "답(부활)을 먼저 가지고, 그 후에 문제를(성경 근거) 찾았다"는 점을 인정한다. 즉, 성경을 연구하다가 부활을 알게 된 것이 아니라, 자신이 의미를 부여한 부활을 설명하기 위해 구약 성경을 다시 뒤져서 논리를 구성했다는 것이다. 분명히 견강부회이며, 문맥을 이탈한 논리적 비약이다. 현대 비평학자들은 "바울이야말로 역사상 가장 위대한(혹은 대담한) Proof-texting의 대가"라고 평가한다. 가장 대담한 궤변론자라는 말이다.

​바울은 이미 "예수는 부활하셨고, 이방인도 구원받는다"는 결론을 가지고 있었다. 이 결론을 증명하기 위해 구약 성경을 샅샅이 뒤져, '자손(단수)', '제 삼일', '믿음' 같은 단어가 들어간 구절을 찾아냈다. ​그리고 그 구절들이 원래 말하려던 역사적 맥락(이스라엘의 회복, 율법 준수 등)을 잘라내고, 자신의 신학적 논리를 완성하는 벽돌(Proof-text)로 사용했다.

구약이 예수를 예언했다는 사후적 재해석과 임의적 편집의 미드라쉬와 폐르쉐를 인정한다면 정통 교회의 이단이란 주장은 설 자리가 없어진다. 누구나 숨겨진 진리를 주장하며 성경의 자의적 해석과 짜집기가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이 맥락 거세의 궤변은 왜 위험한가?
​Proof-texting은 "성경으로 성경을 공격하는" 결과를 낳기 때문이다. "성경에 써 있다"는 절대적 권위를 빌려, 사실은 성경이 지지하지 않는 인간의 탐욕이나 특정 이데올로기를 정당화한다. (예: 십자군 전쟁, 노예 제도 옹호 등도 모두 성경 구절을 Proof-texting하여 정당화되었다). 지금도 성경에 전혀 관심의 대상이 아니었던 트랜스젠더나 낙태 반대를 성경 구절을 갖고 하고 있고 일전에 내가 포스팅했던 대로 하나님/예수님은 채식주의자라는 주장까지 성경을 들어 말한다.

사실 초기 기독교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신학계가 가장 골머리를 앓아온 핵심적인 딜레마, 즉 "해석학적 무정부 상태(Hermeneutical Anarchy)"의 위험성이 존재한다.

만약 "원래 문맥을 무시하고 숨겨진 의미(비밀)를 찾았다"는 방식(미드라쉬/페셰르)을 무제한 허용한다면.. "내가 재림 예수다"라고 주장하는 교주들의 해석과 사도 바울의 해석을 구별할 객관적 잣대가 사라지는 것 아니냐는 지적은 논리적으로 타당하다. 바울은 되고 너는 안된다는 것이 이단 낙인찍기의 본질이 된다. 모든 이단은 성경을 사용한다. 그들은 성경을 연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교리를 증명할 '단어'를 사냥(Proof-texting)한다. 자신이 믿고 싶은 것만 보고, 반대되는 문맥은 무시하게 만든다.
                                                                                  (이하 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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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가 기둥으로 삼는 바울의 신학이 어떤 궤변으로 만들어진 것인지 궁금한 분들을 위해 몇가지 예를 추가로 정리해 봤다.

현대 비평학자들이 "문맥을 이탈한 인용(Decontextualization)" 혹은 "원자적 해석(Atomistic Exegesis: 단어 하나만 떼어내어 해석함)"이라고 비판하는 사례는 수없이 많다. 아니 거의 모든 주장들이 이러한 궤변에 근거하고 있다.

1. 갈라디아서 3:16 - '자손' (단수와 복수의 말장난?)
바울의 논리적 비약이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가장 유명한 사례다.
[바울의 인용] :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한 사람을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

원래 맥락 (창세기 12:7, 13:15 등) : 창세기에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자손(히브리어: 제라, zera)'은 집합명사(collective noun)다. 마치 우리말의 '후손'이나 영어의 'Seed/Offspring'처럼, 단수 형태를 쓰지만, 문맥상 명백히 "이스라엘 민족 전체(다수)"를 의미한다.

바울은 이 단어가 문법적으로 '단수형'이라는 점을 포착하여, 이것이 이스라엘 민족이 아니라 "오직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를 지칭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언어학적으로 억지 주장이다. 집합명사의 특성을 무시하고, 문법적 형태(단수)에 신학적 의미를 억지로 부여하여 아브라함 언약의 수혜자를 이스라엘 민족에서 예수 개인으로 돌변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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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안녕하세요! 간만에 인사드립니다.

choin
Administrator
이건 제가 약간 긴 글로 답변드리겠습니다.

기다리시는 동안, 소위 '페셔'가 잘못 적용되면 어떤 참사를 낳는지, 바바라 티어링의 경우를 한번 읽어보세요.

https://kwangmin.blogspot.com/2015/07/vs_1.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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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안녕하세요! 간만에 인사드립니다.

구사
넵 감사합니다.

긴 글이라니...벌써 머리가 아파오내요^^

공부 오지게 할 생각에...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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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안녕하세요! 간만에 인사드립니다.

choin
Administrator
생각해 보니 예전에 해당 내용을 포함한 글을 어딘가 써두었던 것 같은데, 하드디스크에서 그 글을 찾아 약간 고쳐 올리겠습니다. 가급적 짧게 ....

즐거운 연말 보내세요!

최광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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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안녕하세요! 간만에 인사드립니다.

choin
Administrator
In reply to this post by 구사

답변을 짧게 (...) 포스팅했습니다. 내용에 동의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https://kwangmin.blogspot.com/2025/12/blog-post.html


최광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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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안녕하세요! 간만에 인사드립니다.

구사
소개해 주신..."바바라 티어링의 판타지"를 공부 중입니다. 마저 읽고 답변해 주신 글도 공부해 보겠습니다.
되도록 동의하는 쪽으로 읽어나가겠습니다...ㅎㅎㅎ 또한 글을 많이 줄여주셔서 감사합니다^^